마왕퇴 발굴 당시 관련자들의 주목을 끈것은 관속 액체였다.
마왕퇴는 전한 제후왕의 예에 따라 여러 겹 관곽이 포개져 있었는데
마지막 관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상당량의 액체가 바닥에 차 있었고
썩지 않은 유물은 바로 그 액체 속에 잠겨 있는 상태였다.
마왕퇴 무덤이 처음 열렸을 당시 하나도 썩지 않은 시신과 유물을 보고
중국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은 부패하지 않도록 인공적으로 처리된 것이라 보았다.
시신을 부패하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원망은 사실 한대에 전혀 없던 것도 아니었고
그 시대에 시도했던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가 마침내 성공을 거두어 시신과 유물이 잘 남았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관을 열었을 떄 유물은 물론 시신까지 완벽하게 남은 것을 보고
당시 발굴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이것은 방부처리의 결과라고 생각했고,
"이천년 전 중국 방부기술의 위대한 성취"로 자랑할 만하다고 보았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관속에 고인 액체였다.
이 액체안에 뭔가 풀어 넣은 것은 아닐까?
이 액체가 방부액이 아닐까?
당시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당시 중앙정부와 발굴팀 사이에 오간 문건들 내용을 보면,
마왕퇴 한묘 발굴은 수천년 전 중국의 우수한 보존 기술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발굴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중앙정부에서는 마왕퇴를 "고대 중국 과학의 정화"로 봤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당시로서는 현장에서도 이를 부정할 만한 당장의 이유는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반응이 한국에서도 조선시대 미라를 둘러싸고 비슷하게 나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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