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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나물,
산채는 한국에서 현재 유독 많이 발달하고 남아 있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20세기 이전에도 지금처럼
산채가 건강식이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이 산채는
부족한 경작채소의 양을 보완하는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채소 경작.
조선시대까지도 경작 면적 그다지 넓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지금도 배추농사 생산 과잉이면 갈아 엎는데
썩기 쉬운 채소를 엄청나게 많이 지었다가
그걸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채소농사를 대규모로 짓는 곳은 서울 주변 등 대도시 일각이고
대부분의 시골 농촌에선 텃밭 수준이었을 것이라 본다.
따라서,
심는 채소의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도 모자라면
산채로 보충했을 것이라 본다.
왜 한국에는 산나물이 이렇게 발달했을까?
사찰음식의 유습인가?
필자가 보기엔 그것이 아니고,
채소 농사를 보완하는 역할을 최근세까지도 산나물이 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조선후기까지도 꿩 고기를 닭 고기가 압도하지 못하는 현상이 확인되는데
채소와 산나물도 비슷했을 것이라 본다.
채소는 썩기 쉬워서 대량생산은
주변에 즉각 팔 곳이 있지 않으면 시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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