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가 아니라 증조다 기사 내용 수정 바람 미천왕은 광개토대왕의 증조부임 미천왕의 아들이 고국원왕이고 고국원왕의 둘째아들이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다 고조는 개뿔 고조는 미천왕의 아버지인 돌고가 고조임 수정 바람”
이 지적이 맞다. 아래 계보에서 보듯이 광개토왕에게 미천왕은 증조다. 고조라는 내 기사는 오류다.
미천왕 – 고국원왕 - 소수림왕
고국양왕 – 광개토왕 – 장수왕
시신 도굴 미천왕, 그 영광과 비극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최근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부친 묘 도굴사건은 지금으로부터 꼭 1657년 전인 고구려 고국원왕 12년, 즉 서기로는 342년 2월(양력으로는 3월)에 일어난 고구려 미천왕 시신 도굴사건과 흡사 닮아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 중 한명인 고구려 15대 미천왕(美川王・재위 서기 300~330년)은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0년)의 부친이면서 정복군주로 이름 높은 광개토왕(재위 391~412)에게는 고조할아버지가 된다.(注-붉은고딕 글씨 부분을 ‘증조’로 수정해야 한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권력투쟁에서 밀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소금장수 생활로 연명한 그지만 폭군 봉상왕(烽上王)을 몰아낸 쿠데타 세력에 의해 일단 왕위에 옹립되고 나서는 광개토왕 못지않은 눈부신 정복활동을 펼치게 된다.
한나라 때부터 설치된 현도군을 침입해 8천 명을 생포해 평양으로 옮겼고 요동군의 서안평을 습격해 취했으며 313년에는 4백여 년간이나 계속된 중국의 낙랑군을 드디어 멸망시키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재위시절에는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였다는 광개토왕이나 신라 진흥왕 못지않은 영광된 삶을 살았지만 죽고 난 뒤에는 이만저만한 모욕을 당한 게 아니었다.
그의 시신은 미천원(美川原)이란 언덕에 모셔졌다. 생전 이름이 을블(乙弗) 혹은 우불(優彿)이었던 그가 미천왕이라는 시호(죽은 뒤의 이름)를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고국원왕 재위 12년(서기 342년) 2월 북방유목민족 선비족이 건국한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愰)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 서울인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미천왕릉을 도굴해 그 시신을 꺼내 왕모(王母)를 포함한 고구려 남녀 포로 5만여 명과 함께 끌고 돌아갔다.
치욕을 당한 고구려는 미천왕 시신과 왕모를 돌려받기 위해 전연에 구걸 외교를 펴는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2월 고국원왕은 친동생을 보내 모용왕 앞에서 보물 수천 점을 바치면서 스스로 ‘신(臣)’이라 낮추는 치욕을 감수하고 나서야 겨우 미천왕 시신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용왕은 여전히 왕모, 즉 미천왕의 왕비이면서 고국원왕의 어머니는 13년 동안이나 인질로 붙잡아두고 있다가 고국원왕 재위 25년째에야 돌려보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무덤을 도굴해 시신 일부를 베어간 뒤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번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부친 묘 도굴사건이 미천왕 도굴 사건과 흡사 닮아있다는 것은 두 사건 모두 아무 말이 없는 시신을 볼모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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