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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말하자면 이렇다.
호태왕비를 액면 그대로 취신하는 흐름은 아래 두 개의 토대 위에 있다.
첫째는 일본의 입장-.
무엇보다 신묘년 조 때문에 호태왕비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사료이다.
특히 호태왕비는 당시 한반도의 정세를 고구려와 왜, 두 세력의 대결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사의 입장에서도 반드시 취신해야 하는 사료가 되겠다.
둘째는 우리의 입장-.
무엇보다 고대사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의 입장에서
서기 5세기 당대의 문자 자료라는 점에서 도전을 불허하는 측면이 있다.
비록 비문을 보면 백제와 신라, 가야가 골고루 망신을 당하고 있지만,
어차피 최후의 승자가 같은 한민족 국가인 고구려인데 어떠랴?
다만 신묘년 기사가 문제인데,
그것만 잘 방어하고 나머지는 모두 취신할 만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광개토왕의 남정기사,
교차 검증이 안된다는 말이다.
아신왕의 항복도,
막강 고구려군에 의한 신라의 구원도,
가야까지 쳐들어갔다는 고구려 철기군의 위용도,
문제는 교차검증할 사료가 없다는 말이다.
삼국사기는 물론,
일본사료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시기 광개토왕의 남정 기사이다.
바로 70여년 후의 개로왕 시대 한성백제의 멸망기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왜의 기사까지도 모두 교차 검증이 되는데 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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