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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강목체綱目體 사서라는 것이 있다.
원래 원전은 사마광의 자치통감.
자치통감은 그 전질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치적 명분론의 해석이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책이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성리학자들이
통감을 명분론에 따라 재해석한 책이 바로 자치통감 강목이다.
우리는 이 명분론에 입각한 강목체 해석을
역사의 본령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아주 아주 많다.
필자 또래 대학시절 많이 읽었을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하고많은 역사서 중에 왜 이 책을 들어 그 당시 신입생의 의식화 서적 목록 가장 앞에 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이야 말로 서양판 강목체 역사서의 사상적 흐름을 썼던 셈이겠다.
생각해 보면,
역사학 연구가 강목체 사서를 쓰는 것인가?
지금도 한국은
명분론에 집착한 연구가 아주 많다.
일제시대 연구 논문은
기본적으로 일본 욕을 한두 자락 깔아 놓지 않으면
논문 자체가 성립 안 되는 경우도 많다.
결과가 뻔한 연구는 할 필요도 없고,
그것이 역사학도 아닐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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