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혹은 중국 연구자들 불러다 놓고서는 해외학술 교류 운운하는 말이 버젓이 보인다.
이제 더는 저 두 지역이 해외 학술 운운할 만한 지리 아니다. 적어도 두 지역은 내국이다. 나는 그리 본다.
저 중에서도 일본은 저에 더해서 적어도 내가 직간접으로 간여하는 분야에서 특별한 비교우위 없다.
암것도 없다. 더는 새로운 것도 없고 그래서 더는 배울 것도 없는 빈 쭉정이다.
이는 몇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그 교유 혹은 교류라고 하는 대상 혹은 범위 때문이다.
맨 똑같은 사람과 맨 똑같은 이름의 교유를 수십년 같이하는데 뭐가 새로울 게 있겠는가? 눈꼽만큼도 없다.
그냥 옆동네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한테 무엇인가 새로운 계몽 혹은 각성을 주는 존재일 수가 없다.
신동훈 교수께서 앞서 젊은 시절에 해외학술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는 말씀을 했는데 전적으로 나는 찬동한다.
늙어서 무슨 공부가 되겠으며, 늙어서 젊어서도 안하던 해외 학술교류가 무에 되겠는가? 늙으면 그냥 조용히 사라져 줘야 한다.
문제는 이 젊음이라는 기준.
해외학술교류라는 것도 뭘 해 봐야 할 줄을 알지, 경험도 없으면서 무슨 해외학술교유를 하겠는가?
젊은시절부터 마구잡이로 튀어나가야 한다. 언제부터?
아예 십대부터 싸돌아다니면 좋겠지만 그건 여로 모로 한계가 있을 테고 적어도 20대에는 싸돌아다니기 시작해야 하며, 30대는 그 완숙기로 접어드는 시기라, 30대가 가장 활발해야 하며 40대는 꽃을 피우다 50대가 되면 거두기 시작해야 한다.
30대 시작하는 것도 이미 늦었다. 20대에는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묻기도 하지만, 뜻만 있고 의지만 있으면 요새 진출할 기회 쌔고 쌨다.
sns도 긴요하게 활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해외에 대한 생소를 없앤다.
그를 통해 사람을 사귀며 그를 통해 해외 동향을 감지하며 그를 통해 내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배운다.
해외? 거창한 무엇 아니다.
앞서 지역 얘기를 했느니 죽어도 미국이나 유럽 시장으로 나가야 한다.
국내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솔까 이 분야들만 해도 아주 드문 몇몇 빼고선 내가 보는 놈들은 다 돌대가리들이다.
돌가리가 돌대가리한테서 무얼 배운단 말인가?
그 돌대가리들이 영감을 줄 것도 없으니 오직 나이 직책 갖고 장난밖에 더 치는가?
그 늙다리들 따라 다녀 봐야 암것도 얻어걸릴 것도 없다.
요새는 전부 공채라 그 늙다리들이 내 자리를 마련해 줄 수도 없다.
그 늙다리들 따라다니는 일이 시다바리 말고 뭐가 더 있는가? 그 늙다리들 빛내는 데코레이션이 내가 왜 된단 말인가?
지들은 누릴 거 다 누린 놈들이다. 그 놈들 자리를 빛내게 하기 위해 왜 젊은 내가 희생해야 한단 말인가?
왜 한국학 논문에 sci를, 영어논문을 요구하느냐 헛소리리 할 생각하지 말고, 그 sci에 왜 내 학문을 못 들고 나가는지를 쪽팔려 해야 한다.
나가라. 여기서 지지고볶고 할 생각 말고 넓은 무대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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