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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할 수는 없지만
필자는 대토지 겸병-장원과
지주-전호제는 휴경 극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 본다.
휴경이 극복 안된 상태에서 정기적으로 땅을 놀려야 수확이 되는 수준의 농법에서는
소농민이 자립을 할 수가 없다.
농사는 어느 정도 토지가 집적화 되어 그 중 일부를 놀릴 수 있는 정도로
대규모 겸병-장원이 성립되어야 했을 것이므로
필자 생각에는 우리나라도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이러한 모양의 대규모 겸병-장원 외에
자립한 소농민이 있었다 해도 그 수는 극히 적었으리라 본다.
어쩄건 휴경이 극복되어 소농민이 작은 땅이라도 부쳐 먹고 살수가 있는 시대가 되어야
장원은 해체되고 지주와 전호 사이에 소작제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그 시점은 조선 전기-중기 어간의 어느 시기일 것이다.
우리는 "손바닥 만한 땅을 부쳐 먹는 소작인"이 굉장히 오래되었거나,
원래 자유농민이 토지를 침탈 당하여 소작인으로 전락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소농민이 소작인 형식으로라도 자립하게 된 것은
한국사에서 본다면 얼마 안되는 셈이다.
조선전기-중기 후기라고 본다면
길어 봐야 6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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