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무절공(武節公) 신유정(辛有定)이 일찍이 왜적을 맞아 여러 번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꿇어앉히고 목을 베려고 했다. 이때 무절공은 왜적의 두 다리 사이에 낭신이 축 늘어진 것을 보고 갑자기 손으로 잡아당기니, 적이 땅에 엎어지는 것을 칼을 빼어 목을 베었다. 당시에 그를 맹장이라 일컬었는데, 뒤에 병사(兵使)가 되어 변방을 진압하니 용맹과 공업(功業)으로 저명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너무 급하여 남의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심하게 꾸짖은 뒤에야 끝맺었다.
辛武節公有定嘗遇倭賊。賊將跪而斬之。武節見賊兩脚間腎囊嚲下。猝以手拉之。賊踣地。抽劍斬之。時稱猛將。後杖鉞鎭邊。以武烈著稱。然性大急。見人不可。必極口怒罵而後止。孫文僖公碩祖每曰。鑑祖性急。佩韋自警。嘗修史春秋館。與一下僚。同事筆硯。下僚悤遽間顧吏高聲語曰。辛碩祖將硯水來。旋卽慙赧低頭不能仰視。文僖遽前執手曰。我輩少時失言於先生長者前。豈止此耶。卽呼酒來。滿酌對飮。人服其弘量。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딱 하나다. 불알을 함부로 보이지 말란 것이다. 불알 함부로 보였다는 목숨까지 잃었다니 말이다. 그런 불운한 사나이 왜놈은 훈도시를 걸쳤을까? 아님 속곳이 타졌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신유정 항목을 검출했다. 이에 의하면 시호가 무절(武節)인 그는 1347년(충목왕 3)에 태어나 1426년(세종 8)에 몰했다. 본관은 영산(靈山), 혹은 영월이니 지금의 창녕이다. 의주도병마사, 충청도병마도절제사, 평안도도안무사를 역임한 무인이다.
아버지는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이니,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1386년(우왕 12)에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어 족형인 충청도도원수 이승원(李承源) 휘하에서, 남해에 출현하여 노략질하는 왜구를 무찔러 크게 용맹을 떨쳤다. 그 뒤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무공을 세워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자 그를 시종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어 크게 총애를 받았다. 1397년(태조 6)에 이산진첨절제사(伊山鎭僉節制使)가 되었고, 1400년(정종 2)에 왕세제가 된 이방원(李芳遠: 후의 태종)의 추천으로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이 되었다.
이어 공조·예조·형조 전서(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403년(태종 3)에 강원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공으로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겸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07년에 의주도병마사가 되었고, 1410년에 야인 우디거(兀狄哈)가 경원에 침입하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조연(趙涓)과 함께 출정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그 뒤 충청도병마도절제사·평안도도안무사가 되었다. 1415년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으며,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하루 두끼만 먹었다고 한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다.
(그림 by 여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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