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중앙·항남동 일대 구도심 1만4천㎡ 등록문화재 됐다
송고시간2020-03-09 09:32
박상현 기자
목포·군산 등 이어 6번째 근대역사공간…김천고 본관·수원역 급수탑은 등록 예고
김천고 본관. 뒤쪽 언덕에 교주 최송설당 묘가 있다.
2017년 1월 30일, 나는 이렇게 썼다.
졸업하고는 처음 찾은 모교. 나도 변했듯이 학교 역시 상전벽해라 그 옛날 익숙한 풍광 중엔 적벽조 본관과 교련 훈련하던 운동장, 그리고 교주 최송설당 할매만 남았을 뿐이다. 마침 모교 근처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 시간이 좀 남아 번갯불 콩볶아 먹듯 다녀왔다. 여유가 좀 있었더라면 송설당 할매 묘소라도 참배했을 것이다.…황악산 추풍령에서 내리몰아치는 바람이 매섭더라. 배운 게 도둑질이라 본관은 아마도 근대문화재 등록해야 할 듯 싶다.
오늘 문화재청이 문화재로 등록예고한 것 중 단연 내가 눈길을 주는 데가 '김천고등학교 본관'과 '김천고등학교 구 과학관'이다. 이 외에도 대중가요 '열아홉 순정'과 '무너진 사랑탑', '뉠리리 맘보' 등을 작곡한 나화랑(본명 조광환, 1921∼1983) 김천 생가는 내가 모르는 곳이다. 김천이 코딱지만한 데도 아니고, 김천이라 해서 내가 시시콜콜 구석구석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천 쪽 사정에 나보다 더 빠삭한 고향 선배 김창겸 형한테 물으니, 나화랑은 봉계 사람으로, 그 동생이랑 더불어 대중가요 작곡가로 유명하며, 박정희 시대를 풍미한 '멸공의 노래'도 작곡가이기도 하다고 한다. 봉계에 조씨가 많은데, 그 조씨 집안 사람이라고....
암튼 이번에 문화재 등록이 예고된 김천고 두 건물은 김천 중고등학교 운영주체인 학교법인 송설교육재단 소유다. 본관은 지하는 없는 지상 2층으로 연면적 1,322.22㎡에 건축면적 661.16㎡이며, 과학관 역시 지하 없는 지상 1층으로 연면적 689.26㎡에 건축면적 689.26㎡다. 이 과학관에서는 내가 이 학교 다닐 적에는 많지는 않지만 화학 수업을 진행하곤 했다는 기억이 있다.
건립시기는 본관이 1932년이고, 과학관이 1939년이다. 구조는 본관이 조적조+철근콘크리트조이고, 과학관은 조적조다.
이 중에서 본관은 한국인 최초의 건축가로 꼽히는 박길룡 설계라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김천고 본관과 최송설당 동상
문화재위원회가 제출한 등록가치의견은 이렇다.
- 김천고등학교는 일제강점기 최송설당에 의해 민족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1931년 설립된 학교이며, 개교 초기에 건축된 본관 및 과학관은 학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 건물이자 지역 근대기의 대표적 유산으로 현존.
- 1932년 건축된 본관은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 박길룡(1898~1943년)이 설계하였으며, 당시 일반적 조적조 교사와는 달리 경사지붕이 아닌 평지붕, 단순하게 구성된 중앙 현관부, 기하학적 구성의 넓은 창문 등에 의해 별다른 장식적 기법이 없이 전체적으로 단순하게 구성.
- 1939년 건축된 과학관은 T자형 평면을 구성하고 본관과 마찬가지로 외관은 별다른 장식적 기법이 없이 적벽돌 외벽, 장방형 개구부에 의해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기능적으로 구성.
- 김천고등학교 본관 및 과학관은 이상과 같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역사적 내용과 의미를 포함하고 건축적 특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등록문화재로 보존할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됨.
김천고 본관 전면
본관은 그 상량문에 의하면 1932년 7월 9일 상량되었으니, 공사관계자 명단 중에 ‘건축설계기사 박길룡’이라는 기록이 있어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 박길룡(1898~1943년)이 설계한 것으로 확인된다. 박길룡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건축교육을 받고 졸업했다. 시공사는 한강철교를 시공한 하자마구미[間組]다. 1932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는 박길륭이 자신의 설계사무소 개소를 알리는 광고에서 김천고등보통학교 본관을 자신이 설계했으며, 1932년 6월 당시 공사 중이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건축 당시 질 좋은 평양산 벽돌을 운송하여 건축한 것으로 전해지며 한국전쟁 당시 일부가 훼손된 후 복구되었고 현재도 외벽 일부에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상태다.
모교에서
본관 인근 서쪽에 들어선 과학은 건축년도가 건축물대장에는 1958년이라 했지만 학교측 문서, 사진, 증언 등에 의하면 1938년 11월 착공되어 1939년 12월 준공됐음을 안다. 붉은 벽돌로 지은 ‘T’자형 건물인 과학관은 붉은 벽돌에 의한 내력벽체를 구성하며, 지붕은 목조트러스로 구성했다. 신축 당시 특별교실 용도였으며, 현재 시설 일부는 매점으로 사용한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그 뒤에는 작은 온실이 있었다. 이 온실은 내 학창시절 기억에는 없다.
김천고등학교는 1931년 최송설당이 설립한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이 민족정신함양을 위해 설립한 김천고등보통학교가 모태다. 1938년 4월에 김천중학교로 개칭했다가 제2대 교장 정열모가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자 1942년 3월 강제로 폐교당하고는 같은 해 4월 공립으로 이관되었다.
광복 후 사범과와 전수과를 설치하고 경상북도 초등교원양성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김천중고교 설립자인 최송설당. 송설당은 물론 호다. 본명은 알 수 없다. 본인도 함구했다. 그는 불교에 심취했으며, 막대하게 축적한 부를 불교계에 투척한 대단월 중의 대단월이다. 지금도 유서 깊은 사찰 암벽에서 최송설당 이라는 마애각석을 쉽사리 찾는데, 독신으로 지냈으며(일설에는 젊은시절 출가했다는 말도 있다) 후손이 없었고 양아들이 있었으나, 유산을 상속하지 아니하고 전 재산을 학교에 기부했다.
김천중고교 설립자는 최송설당이다. 경상북도 김천 태생인 송설당(1855~1939년)은 영친왕 보모 출신으로 시문에 능하여 1922년 『송설당집』을 발간하기도 했으며, 낙향 후 1931년 자신의 전재산을 희사하여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다.
1950년 조각가 윤효중(1917~1967)한테 의뢰해 제작한 송설당 동상이 2016년 ‘최송설당상(崔松雪堂像)’이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496로 등록되었다.
송설당은 태어난 곳이 김천이나, 그 할아버지인가가 전라도 고부 출신이라, 김천 현지에서는 그를 일컬어 "고부 할매"라고도 한 까닭이 이에서 말미암는다. "고보 할매"라고도 불렀는데, 김천고보 설립자라 해서 그리 불렀음을 적기해 둔다.
김천고 전경
*** 결국 문화재가 되었다.
송고시간 2020-05-04 09:56
임동근 기자
6·25 전쟁 군사 기록물, 나석주 의사 편지 등 6건은 등록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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