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이라고 정조 관념이 없다고 나는 이리 안이하게 보지는 않는다. 기생은 으레 그런 존재이기에 이를 받아들이는 남자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 보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우리가 배운 조선시대 통념, 성관념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나는 본다. 물론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성 억압이 외려 기독교 시대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본다.
조선시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성 개방 시대였다. 혹자는 양반 사대부가에서만 성 억압 윤리가 통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저 밑에서는 욕망이 꿈틀대는데 양반 사대부가만 그렇지 않았다고?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뭐가 통념이 잘못되었다.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다. 두 번째 예화가 많은 상념을 낳는다. 기생이라 표현한 한 여성을 왕의 특사, 흔히 말하는 어사와 아마도 그의 기둥서방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공유하는데, 이 기둥서방도 이 어사도 아무런 도덕의 제약이 없다.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薦枕, 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例)가 있다. 감사(監司)는 풍헌관(風憲官)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晉川) 강혼(姜渾)이 영남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星州)의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 점심 때가 되어 부상역(扶桑驛)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부상 여관에서 한바탕 기쁘게 보내려니 / 扶桑館裏一場歡
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고 했다. 이는 침구를 이미 개령(開寧, 지금 김천)에 보내어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기로 이불이 없이 잔 것이다.
또 어떤 감사가 있었는데, 기생과 상방(上房)에서 자고 새벽이 되어 변소 간 틈에 따르던 사람이 와서 밀고(密告)하기를, “공이 나간 후에 연소자(年少者)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생을 범하고 나갔으니, 참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감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 그 자의 아내를 내가 빌려 간통한 것이니, 본남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이 괴이할까 보냐.” 했다. 진천 강혼의 법을 준수함과 감사의 넓은 도량은 가히 어려운 일이다.
使命之出外也。有妓各官例定薦枕之妓。而監司則爲風憲之官。雖薦枕於本邑。不得馱載而行。亦舊例也。姜晉川渾按嶺南時。鍾情於星州妓銀臺仙。一日自星巡向列邑。午憩于扶桑驛。驛乃州之半程。故妓亦隨往。至暮不忍別去。仍宿于驛。翌朝題詩贈之曰。扶桑館裡一場歡。宿客無衾燭燼殘。十二巫山迷曉夢。驛樓春夜不知寒。蓋寢具已送于開寧。未及取還。故無衾而宿也。又有一監司。與妓宿于上房。曉起如廁。從人密告曰。公起出之後。有年少人。猝入房內。犯妓而出。可駭可駭。監司笑曰。爾勿復言。渠之物吾借而奸矣。本夫之事。何足怪乎。晉川之守法。監司之洪量。可謂難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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