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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한국과 중국의 미라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2)

by 초야잠필 2019.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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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우리나라 미라의 경우 다른 나라 미라와 구별되는 특이한 점은 인공적인 방부처리에 의해 만들어진 미라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자연적인 환경에서 형성된 미라도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연적인 미라-. 라고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인위적 처리 없이 미라가 만들어지는 상황은 크게 보아 딱 두 가지다. 

첫째는 아주 건조한 환경이다. 지구상에는 이런 극도의 건조한 환경하에서 박테리아가 제대로 번식할 조건도 충족하지 못하여 사람이 그대로 미라화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중국 신강성 타클라마칸 사막에는 이처럼 보존상태가 완벽한 미라가 종종 발견된다. 이런 미라 존재는 일찍이 이 지역을 조사한 서구 탐사반에 의해서도 알려진 바 있어 사람들에게 꽤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 미라는 무려 4000년 전 분이다. 

 

예를 들어 중국 서부, 과거 실크로드라고 불렸던 지역-. 

신강성 타클라마칸 사막은 이런 종류의 미라가 자주 발견되는 데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지역의 하나인 칠레 북부에 위치한 "아타카마 사막 Atacama desert"이라는 곳도 그렇다.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의 하나로 꼽히는 이 지역에서도 종종 미라가 발견된다. 물론 극도의 건조한 환경에서 형성된 자연적인 미라화의 결과이다. 

 

Atacama desert-. 

 

또 한 가지 자연적으로 형성된 미라가 자주 발견되는 곳은 앞에서도 이야기했 듯이 만년설이 덮인 영구동결지대 (permafrost)다. 사고에 의해 묻혔건 아니면 의도된 매장이건 간에 이런 지역에 묻힌 사람은 그대로 얼어 썩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가 "자연적으로 형성된 미라"라고 부르는 것은 예외 없이 바로 이 두 가지 종류 중 하나다. 

이런 분류법에 예외적인 존재가 딱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시대 미라다. 

일단 우리나라는 기후로 볼 때 도저히 미라가 생길 만한 조건이 아니다. 

건조하지도 않고 영구동결지대도 아니다. 한국이 얼마나 시신이 사후에 부패하기 좋은 조건인가 하는 것은 고고학 발굴현장을 가 보면 안다.

우리나라는 무덤 안에 사람 뼈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옆나라 중국, 일본만 해도 수천년전 인골이 수백 수천 개가 발굴되어 보존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는 제대로 남아 있는 사람 뼈가 거의 없다.

이처럼 시신이 잘 썩는 것은 당사자와 유족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잘 된 일이지만 우리 같은 연구자에게는 약간 슬픈 일(?)이기도 하겠다. 

 

발굴현장의 무덤들-. 이렇게 많이 발견되지만 사람 뼈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 땅이 시신이 잘 보존되는 토양이 아니라서 그렇다. 

 

아무튼 자연 기후로 볼 때 도저히 미라가 생길 수 없는 조건인데 왜 미라가 보고되는가? 

우리나라는 미라가 아무 무덤에서나 나오는 것은 절대 아니며  나오는 무덤 종류는 딱 정해져 있다. 

바로 조선시대 "회곽묘"다. 

조선시대 회곽묘라는 것을 들어보셨는지? 이 무덤은 우리나라 조선시대 대략 중-후기에 집중하여 만들어 진 무덤인데 아무나 이런 무덤에 묻힌 것은 아니었다. 일단 이런 회곽묘에 묻힐 만 한 사람은 조선시대에는 좀 살 만한 사람이었다고 보아도 좋다. 

또 한 가지. 단순히 먹고 살 만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유교의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 회곽묘라는 것은 그냥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무덤 양식이 아니라 그 무덤의 성립과 발전, 전개에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굉장히 강하게 관여해 있는, 그런 무덤이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형태의 조선시대 회곽묘. 관을 둘러싸고 있는 회곽을 개방한 상태이다.

 

그래도 회곽묘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은 저 유명한 "오페트르 도굴 사건"을 생각해 보면 된다. 

잘 아시다시피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란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1868년 (고종 5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에 있던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일국 왕의 할아버지 무덤을 파헤친 이 엽기적인 사건은 아마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페르트는 왜 도굴에 실패했던가-.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대원군이 남연군의 무덤에 쇳물을 부어 굳혀 도저히 도굴을 못했다던가. 뭐 이런 류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사실 그건 아니고. 

오페르트가 도굴에 실패한 원인은 바로 관 주위에 굳혀 놓은 "회"때문이었다. 

 

오페르트에 의해 도굴 될 뻔 한 남연군 묘. 

 

회灰가 무엇이기에 이것 때문에 도굴도 못할 지경이었을까?

사실 조선시대 무덤을 만들 때 회를 쓴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아마 돌아가신 분 장지까지 따라가 하관下棺하고 마무리 하는 광경을 목격하신 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지금도 관을 하관한 후에 횡대를 놓고 그 위에 석회를 몇 삽 뿌린다. 왜 석회를 뿌릴까? 어떤 사람들은 소독을 위해서인가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장면은 실제로는 조선시대부터 계속 보존되어 내려온 장면이다. 조선시대 무덤을 발굴해 보면 관 위에는 횡대가 있고 그 위와 관 주변에 석회 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횡대를 두고 그 주변에 두꺼운 석회벽을 만들던 것이 지금은 간단히 석회로 몇삽 떠서 뿌리는 약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아주 강고한 매장 전통이 지금도 장례식 현장에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계속)

 

오늘날에도 고인을 매장할때 사용하는 물품 중 한자리를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횡대. 위 사진 설명을 보면 "관위에 쏟아 붓는 회 반죽이 직접 관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 횡대를 놓는다고 했다. 횡대와 회반죽의 전통은 조선시대 회곽묘로 부터 내려와 아직도 살아 남아 있는 유교적 전통이다. 

 

앞선 연재는 아래 기사 클릭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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