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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한국과 중국의 미라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3)

by 초야잠필 2019.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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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각설하고. 여기서 오페르트의 이야기를 좀 더 보자. 

 

오페르트 도굴은 사실 자기들끼리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 천주교도와 신부가 깊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 도굴과정에서도 현지인 도구를 빌려했다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그 곳에 사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은 해야 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조선어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했을 것인즉-. 

 

오페르트 남연군 묘 도굴에 관여했다는 혐의가 있는 페롱신부. 오페르트가 대원군에게 보냈다는 글에 "남연군 묘를 도굴해 개항 시키는 것이 전쟁보다는 낫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페롱신부의 평소 지론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페롱신부는 군사작전으로는 조선을 개항시킬 수 없고 좀 더 유화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는데 그 방법이 황당하게도 남연군 묘 도굴. 천주교도가 오페르트 도굴에 관여하고 있었음은 페롱신부 서신 등을 보면 어느 정도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오페르트는 도굴에 실패했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대원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謹言, 掘人之葬, 近於非禮, 勝於動干戈, 陷民塗炭之中, 故不得已行之。 本欲奉柩於此, 想必過度, 故停止耳。 此豈非敬禮的道乎? 軍民豈無破石灰之機械也哉? 

 

"삼가 말하건데,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력을 동원하는 것 보다는 낫습니다. (당신이)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으므로 부득이 하게 이렇게 한 것입니다. 원래는 시신을 이리로 운구해 오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너무 지나친 거 같아 그만둔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이 어떻게 예가 아니라 할 것입니까? (우리를 돕던) 백성들이 어찌 석회를 팔 기계 하나 없었겠습니까?" 

 

오페르트 이야기는 내가 이 무덤 하나 못팔 거 같냐.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파서 당신 아버지 시신을 끌고 올 수 있었지만 내가 너무 지나친 거 같아 관둔 것이다. 이래도 내가 예의도 모르는 넘이냐. 

 

이런 소리인데-. 

 

오페르트 말은 허풍이다. 

 

왜냐. 당시 동네 장비를 다 동원해도 대원군 아버지 무덤을 하루밤새 파내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페르트더러 니 맘대로 한 번 파보라고 놔뒀어도 아마 사흘 밤낮은 두들겨 대야 간신히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예전 필자는 그야말로 옛날 식대로 현장에서 정과 끌로만 회곽을 부수고 관을 노출시키는 것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관까지 들어가는데 정확히 3일 걸리더라는 말씀.

  

회곽묘는 석회와 모래, 그리고 황토를 적당한 비율로 혼합하여 다져 만드는데 좀 잘 사는 사람일 수록 회 두께가 두껍고 또 단단하게 다져놓은지라 이것이 한 번 굳어버리면 요즘 시멘트보다 더 단단하다. 어느 정도 단단한가 하면 곡괭이로 내리쳐도 날이 튀어 나올 정도다.

 

노출시킨 관과 주변의 회곽. 시멘트나 다름없다. 조선시대 회곽묘는 관을 시멘트로 발라 밀봉한 무덤이라고 보는 게 맞다. 

 

거기다가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은 말 그대로 조선왕의 할아버지. 회곽을 얼마나 잘 만들어 두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내가 예전에 어느 조선시대 유명한 정승을 지낸 분 발굴 현장을 목격한 경험으론 이 분의 관 위에는 회벽이 거의 1미터 가깝게 만들어져 있었다. 남연군의 무덤도 아마 그 정도로 잘 다진 회곽이 1미터 넘게 다져져 굳어 있었을 것이다. 이건 하루 밤에 뚝딱거려서는 절대로 못 부순다. 

 

조선시대 어느 정승을 지냈던 분의 무덤 이장 현장. 관주변의 회곽이 무려 1미터 넘게 쌓여 거대한 콘크리트 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무덤은 처음에는 망치와 곡괭이, 끌 등으로 작업하다 결국 건설 장비를 동원해서야 간신히 해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보는 조선시대 무덤-. 특히 아래와 같은 사대부의 무덤은-. 

 

 

퇴계선생 묘. 퇴계는 주자가례에서 회곽을 실제로 만드는 법에 대한 주를 꼼꼼히 단 양반이다. 이 분 무덤은 당연히 회곽묘일 것이다. 

 

봉분을 제거하고 그 아래를 파 들어가면 예외 없이 저런 콘크리트 박스처럼 생긴 회곽을 만나게 되는것이다. 그 회곽을 부수어야 비로소 관을 만난다. 그 회곽이 저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으므로 여간해서는 무덤을 도굴하기 힘든 것이다. 

 

회곽묘의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예측한 양반이 1000년 전에 중국에 있었다. 

 

"석회는 모래와 섞이면 단단해지고 황토와 섞이면 차져서 세월이 오래되면 결국 온전한 돌이 되니 땅강아지와 개미와 도둑이 모두 들어올 수 없다" 

 

"혹자가 '순전히 회만 써야 합니까?'라고 하자 말하였다. '순전한 회만으로는 아마도 견실하지 못할 듯 하니 체로 친 가는 모래를 섞고 오래 있다가 회와 모래를 넣으면 견고함이 돌과 같아진다' 

 

회곽의 비교할 수 없는 견고함을 목소리 높여 주장한 이 사람-. 

그리고 그 이론을 다듬고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펴 낸 사람-.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도 말할 수 없이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바로 주자라고 불린 남송대의 거유巨儒 주희朱熹였다. (계속) 

 

주자-.

 

 

앞선 연재는 아래 클릭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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