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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한국과 중국의 미라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5)

by 초야잠필 2019.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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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사실 주자가 회곽묘를 창안하지는 않았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주자가 살아있을 당시 이미 그가 살던 중국 강남 땅에는 회곽묘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국내에는 아직 잘 안 알려졌지만 중국쪽에도 우리와 같은 회곽묘가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처럼 회곽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요장묘浇浆墓 혹은 삼합토 요장묘三合土浇浆墓라고 부른다. 

이 무덤이 현재까지 고고학 발굴로 확인된 것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북송대에 속한다.

주희가 남송대 사람이므로 이 무덤은 주자가 생존하던 당시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셈이다.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역도 주희가 살던 양자강 일대로 내가 안다.  

중국 쪽 자료에서 이 무덤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면 우리 회곽묘 만드는 방법과 거의 방불하다.

하지만 실제로 고고학 발굴에서 확인한 송·명대 회곽묘 모양을 보면 형식이 통일되진 않아 모두 다르다.

관 주변에 회벽을 조영했다는 점만 같을 뿐이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여러가지 형식 "회곽묘". 무덤 주위에 회를 두른 점만 같고 모양은 제각각이다. 회색 부분이 회벽 부분에 해당한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회곽묘가 중국에 존재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회곽묘는 주자가례朱子家禮처럼 강력한 윤리적-사상적 강제에 의해 숭상되며 조영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곽묘가 중국에서 창안되고 유지되며 계속 조영되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무덤이 지닌 장점 때문이었다.

어떤 부분이 이 무덤을 매력적으로 만들었는지 다름 아닌 주자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석회는 모래와 섞이면 단단해 지고 황토와 섞이면 차져서 세월이 오래되면 결국 온전한 돌이 되니 땅강아지와 개미와 도둑이 모두 들어올 수 없다" (주자가례)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중국인들 역시 회곽묘(요장묘)를 만들때는 부모 친지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려고 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주자가례를 한번  보자. 

"옛사람의 장례는 죽은 이를 위해 흙이 피부에 직접 닿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지금 부장품도 오히려 보호하고 감추는 것을 견고하게 하고 주밀하게 하여 손상되거나 더러워지는 것을 막는데 하물려 어버이 유골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세속에 식견이 얕은 사람들은 (유골을) 보이지 않게 할 따름이라거나 또는 속히 썩게 해야 한다고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어찌 의리를 아는 것이겠는가? 썩지 않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썩지 않은 사이에 보호하고 감추는 것을 마땅이 이처럼 해야하는것이다" (주자가례)

하지만 틀렸다. 

중국에서도 예외없이 회곽묘안에서는 미라가 만들어졌다. 

가끔 신문지상에는 중국에서 발견되었다는 미라 소식이 뜨는 일이 있는데, 한나라때 미라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송대 이후 회곽묘 (요장묘) 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신문 반응을 보면 우리처럼 중국인들도 이를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인 듯 하다. 

중국에서 발견된 미라. 우리 회곽묘와 거의 비슷하다. 


"회곽묘 (요장묘)"라는 것이 주자가 창안한 것이 아니고 이미 북송대부터 강남 지방에 있었다면 이 무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현재 내가 이 회곽묘 기원을 추적할 역량은 되지 못한다. 이 문제는 앞으로 필자가 은퇴할 때까지 게속 추구해야 할 인생 연구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흐릿하게나마 현재 감을 잡은 것은 무덤 관 주위에 뭔가를 둘러 놓는 풍습은 양자강 유역의 뿌리 깊은 유습이라는 점이다. 

가장 비슷한 예가 앞에서도 한번 이야기한 2000여년 전 한대漢代 미라의 경우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마왕퇴馬王堆 미라가 가장 잘 알려졌지만 유사한 한대 미라는 이미 중국에서 서너 케이스가 보고됐다. 이 한대 미라는 모두 양자강 유역, 과거 초나라 땅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초나라 땅, 지금의 장사長沙 중심 호남성湖南省 일대에는 전국시대 이래 특이한 형태의 매장 풍습이 발달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관 주위에 고령토를 둘러 놓는 양식이다.

찰진 고령토를 관 주위에 다져 놓아 관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밀봉하는 것이다. 



 
앞 그림은 앞에서 한번 본 마왕퇴 무덤 구조다. 무덤 가장 안쪽에 놓인 시신이 미라가 된 피장자被葬者다. 주변에는 겹겹이 배치한 관곽棺槨이 있다.

그리고 관 가장 바깥에는 탄炭이 쌓였고 그 바깥 흰색 부분이 바로 고령토다.

고령토와 탄으로 관곽을 둘러싸는 모양은 초나라 땅 유습으로 늦게는 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는데, 바로 이런 형식 무덤에서 미라가 발견된 것이 유명한 마왕퇴 미라를 비롯한 한대 미라다. 

결국 마왕퇴 미라는 같은 양자강 유역 송·명대 요장묘에서 발견되는 미라, 그리고 바다 건너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발견되는 미라까지 이어지는 전통의 가장 이른 시기 사례에 해당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만 이처럼 한대까지도 조영되던 고령토를 관 주위에 두르는 풍습이 어떤 방식으로 송대까지 전달되어 내려왔는지-.

이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 필자가 천착하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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