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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한국과 중국의 미라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6)

by 초야잠필 2019.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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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필자의 변] 필자가 김샘 블로그에 우리 연구실 이야기를 연재하기로 생각한 후부터 왠만하면 화-금요일의 연재 주기를 지키려 했지만 이번주 화요일 연재는 우리 연구실에서 깊이 관여한 제주도 학회 개최와 연구비계획서 작성 등 몇가지 업무가 삼각파고로 겹쳐 기어이 속수무책으로 쉴수 밖에 없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아예 한번을 건너뛰고 금요일 연재로 바로 이어 붙이고자 한다. 양해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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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앞에서도 썼던 것 처럼 중국의 회곽묘 (요장묘; 浇浆墓) 의 구조는 매우 다양하다. 

상해 인근에는 그 동안 명나라 때 무덤이 많이 발굴 되었는데 여기서 확인 된 모든 무덤이 회를 쓴 요장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설사 요장묘인 경우에도 그 구조가 매우 다양하여 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 설명하기 어렵다. 

요약하면 주자가례에서 회는 무덤에 동식물과 도굴꾼의 침범을 막기 위한 극히 실용적인 용도로 기술 된 것이므로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는 그 자체 하나의 정형화 된 형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발견 된 명대 회곽묘 (요장묘). 

주변에 두껍게 쓴 회가 보인다. 우리나라 회곽묘와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

 

아래는 그림을 보자. 중국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회곽묘 중 우리 나라 회곽묘와는 확연히 다른 구조를 보이는 경우이다. 

이런 종류의 회곽묘는 우리나라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래 그림과 같은 회곽묘는 우리나라에서도 부부합장묘의 경우 종종 보이는 모양이다. 특히 독자의 입장에서 왼쪽에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 회곽묘와 아주 비슷한 모양의 요장묘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째서 중국에서 보이는 다양한 모습의 요장묘 중 특정한 형식의 무덤만 선택적으로 조선에서 회곽묘로 발견되는 것일까? 

이는 주희가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지던 다양한 형태의 요장묘 중 특정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 진 것만 주자가례에서 골라 소개 했기 때문이다. 

주자가례의 해당 구절을 보자. 

 

"광을 파는 일이 이미 끝났으면 먼저 재를 광의 밑바닥에 깔아 두께 2-3치를 넣어 다진다. 그 후에 석회와 가는 모래, 황토를 골고루 섞은 것을 그 위에 펴는데 석회 3푼에 두 가지는 각각 1푼 씩이 좋다. 두께 2-3치를 쌓아서 다지고 특별히 얇은 판으로 회격을 만드는데 곽의 형상처럼 한다. 안은 역청으로 바르되 두께는 3치 쯤으로 하는데 가운데는 관이 들어갈 수 있게 한다. 담장은 관보다 4치쯤 높게 하는데 석회위에 놓고 곧 사방에 4물을 둘러 넣고 역시 얇은 판으로 막는다. 재는 밖에 넣고 세가지 물건은 안에 넣는데 밑바닥의 두께와 같게 한다. 쌓은 것이 이미 굳었으면 그 널판을 위쪽으로 빼고 다시 재와 회 등을 넣고 쌓아서 담장과 평평해지면 그친다. 대개 곽을 쓰지 않았다면 역청을 바를데가 없으므로 이 제도를 쓰는 것이다. 또 재는 나무뿌리를 막고 물과 개미를 피하게 하며 석회는 모래와 섞이면 단단해지고 황토와 섞이면 차져서 세월이 오래되면 결국 온전한 돌이 되니 땅강아지와 도둑이 모두 들어올 수 없다"

주자가례에 그려져 있는 회곽묘의 구조. 

주자의 기술을 토대로 그려진 그림으로 한국에서 이후 주자가례를 본받아 만들어진 모든 예서들이 전부 이 그림을 차용했다. 

공간 가운데에 관을 두고 주변에 회벽을 쌓는 모양을 설명하고 있다. 

 

 

 

주자가례에서 설명한 회곽묘 만드는 방법. 관이 놓일 공간의 주변에 회로 벽을 먼저 쌓아 곽 모양을 만들고 그 후에 관을 안치한다는 점에서 김우림 선생은 이러한 무덤 만을 특정하여 "회곽묘"라 불렀다. 선생은 이 외에 "회격묘"라는 형식의 무덤을 따로 구분하여 조선시대의 회곽묘를 크게 "회격묘"와 "회곽묘"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부분은 다시 한번 후술하기로 한다. 

김우림 선생의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 2016)에 있는 그림을 참고하여 새로 그렸다. 

 

결국 당시 중국사회에서는 주자가 언급한 요장묘 (회곽묘)와 매우 비슷하지만 다양한 변형이 용인 되었기 때문에 회곽묘의 형태는 하나가 아니었다. 주희가 주자가례에서 설명한 방법대로 만들어진 회곽묘는 중국에서 최근 보고된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고려해 보면 결국 당시 그곳에서 요장묘를  만드는 다양한 기법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어떻게 보면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나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른바 "Out of Africa" 이론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아래는 잘 알려진 전세계 현생인류의 유전형 분석을 통해 그 계통을 정리한 도면이다. 

전세계 인류가 어떻게 나누어지고 지금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각 인종과 민족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흔히 전세계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어느 시점에 이동해 나온 소수 그룹의 후손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실제 아래 그림을 보면 아프리카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사람들의 경우 아프리카에 살던 사람들의 일부 그룹만이 아프리카에서 나와 전세계로 흩어지면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잘 볼 수 있다. 

결국 인류의 기원이 되는 "아프리카인의 유전적 다양성"이 "비아프리카인의 유전적 다양성" 보다 더 크고 비 아프리카 지역의 사람들은 일정 시점에 소수의 아프리카 인이 나와 분화 하면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모그룹인 아프리카인의 유전적 다양성을 넘어설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곽묘(요장묘) 역시 마찬가지이다. 요장묘는 중국에서 훨씬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고 그 기원은 성리학과는 무관하다. 

양자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의 토착 묘제의 하나가 오랜 시간동안 발전하여 북송대에 이르면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요장묘의 기본적 형태로 진화를 완료하였다. 

이 후 이 무덤이 활발히 만들어지던 남송가 되면 주자가 이 무덤이 (석실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저렴한 가격으로 만들 수 있지만 외부의 침입에 특출한 방어력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 무덤 제작법을 채록하여 주가가례에 적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당시 주자가 살던 지역에는 이미 다양한 형태의 요장묘가 만들어지고 있었으므로 주자가 묘사한 요장묘 제작법은 그 중 하나의 제작법에 불과 했을 것이다. 

결국 주자에 의해 선택된 요장묘 제작법은 주자가례와 함께 조선에 수입되어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기 눈으로 직접 "요장묘"의 제작 현장을 현장에서 목격한 바 없으므로 주자가례에 적힌 요장묘 (회곽묘) 제작법 하나만을 지남으로 삼아 그대로 머리속으로 상상하며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것이다. 

꽤 다양했던 중국의 요장묘 중 일부 형식만 조선에서 회곽묘로 채택되어 번성하기 시작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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