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불교식 상장례를 타파하고 주자가 정리한 주자가례를 조선의 공식적인 매장 방식으로 채택했다고는 하지만 조선 바닥 그 누구도 회곽묘를 실제로 만드는 방법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를 이미 했다.
회곽묘에 사용한 재료. 위에 보이는 재료 중에 석회·모래·황토를 삼물三物이라 부르는데 이것으로 섞어 관 주위에 다져두면 굳어 회곽이 된다. 마사토는 무덤 주변의 생토층을 상징한다.
회곽묘는 지배계층의 대 불교 "사상투쟁" 과정 중에 채택된 묘제이므로 회곽묘는 조선 계급사회의 가장 높은 지위의 사람부터 아래로 그 유행이 흘러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 회곽묘는 "국조오례의"의 흉례 "치장" 편에도 기술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국초에 이미 이 묘제를 조선의 "공식적" 묘제로 채택해야 겠다는 국가의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국조오례의에는 다음과 같이 회곽 무덤을 만들라고 기록되어 있다.
"드디어 광을 판다 (고도리의 광이 아니라 무덤 광, 묘자리를 판다는 말이다). 이미 다 팠으면 먼저 숯가루를 광壙 밑에 펴서 두께가 2, 3촌寸 되게 쌓아 채우고 다음은 석회, 가는 모래, 황토를 두루 섞은 것을 그위에 깔아서 두께가 2, 3촌 되게 쌓아 채우고 곽을 그 위 한가운데에 놓는다. 이어 사방에서 네가지 물건을 (석회, 가는모래, 황토, 숯)을 빙빙 돌려서 내려 보내는데 얇은 판조각으로 막아서 숯가루는 바깥쪽에 있게 하고 세가지 물건 (가는 모래, 황토, 숯)은 안쪽에 있게 해서 밑의 두께와 같이 쌓는다. 이미 채워지면 그 판조각을 도로 빼내서 위와 가깝게 하고 다시 숯과 석회등 물건을 내려 보내 쌓아서 곽의 평면까지 미치면 그친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보면 아래와 같다.
묘광을 파고 회를 바닥에 펴서 깔고 그 위에 관을 놓은 다음 주변에 회와 다른 물건들을 다져 쌓아 올려 회곽안에 완전히 관이 갇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면 실제로는 시멘트 덩어리 안에 관이 갇혀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이 된다. (이 그림은 사실 우리가 조선시대 미라 연구를 처음 시작할때에 그려 둔 것인데 약간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 나중에 수정본을 재 게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국조오례의에 회곽묘를 만들어 쓰라고 기록해 두었다고 해서 바로 이 제도가 조선시대 지배층 사람들의 묘제로 만들어 지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마음만 앞섰을 뿐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당장 임금님의 왕릉부터 문제였다. 태조의 능을 고려시대 전해 오던 대로 석실石室로 할것인지 아니면 회격灰隔으로 할것인지 세자에게 종묘로 가서 동전 던지기를 한 결과 석실로 당첨.
세종대에도 사대부와 왕실의 무덤은 회곽을 써야 한다는 명분론에 따라 대신이 세상을 뜨면 나라에서 석회를 공급하게 하였다. 물론 그 석회를 들고가서 회곽묘를 만들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주자의 말에 따라 회곽묘를 만들어 써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 조차도 이런 무덤 한 번 본 적이 없으니 과연 이런 무덤이 제대로 만들어 지기는 할 것인지. 주자가례에 써 놓은대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돌처럼 굳어 석실묘보다 더 단단해 질 것인지 아무도 자신있게 장담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좋다.
자신있게 장담을 못하니 우리 부모님 무덤에서 쉽게 쓸수 없고 임금님 무덤에 썼다가 잘 못되기라도 했다가는 난리가 날 판이니 모두 몸을 사렸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제. 세조는 자신의 무덤에 대해 이렇게 유언한다.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마련하지 말라. 또 석실은 유명무실한 것이므로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지만 세조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신숙주 등은 석실을 써야 한다고 끝까지 버텼다.
"안에는 석실을 쓰고 밖에는 단지 돌 난간을 설치하여 석물등과 같은 의물은 예전대로 하십시오"
"선왕에게는 모두 석실을 썼는데 세조께서 유명으로 쓰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억제해 줄여서 폐를 덜게 한 것입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능침의 견고함은 석실만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석실이 아니면 기물을 간직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전지를 내려 석실을 쓰지 못하게 하시니 신등은 속으로 참을 수 가 없어서 감히 계달합니다"
조선 전기의 명신 신숙주는 회곽묘를 왕릉에 도입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때 정말 석실이 좋다고 여겨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세조의 무덤에 회곽을 쓰라는 선왕의 유언대로 덜컥 회곽을 썼다가 나중에 뒷수습도 못하는 상황이 두려웠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하들은 끝까지 반대했고 예종의 "용단으로" 결국 조선시대 왕릉 최초로 세조 릉은 회곽묘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선왕의 유언, 그리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쓴 후계자의 단안 외에는 이 생소하기 짝이 없는 무덤을 왕국에 관철시킬 방법이란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국조오례의에 기술된 방식 그대로 만들어진 회곽묘이다. 용인흥덕 출토 (기전문화재연구원). 2005년. 이른 시기에 조성된 회곽묘이다.
그리고 왕이 용단을 내려 회곽을 쓴 이상 이 해괴하기 (!) 짝이 없는 무덤은 왕실로부터 사대부로, 그리고 중인계급과 일부 부유한 평민에 이르기까지 위에서 아래로, 조선사회 전체를 관통하며 유행하게 되었다.
이리 보면 해피 엔딩이겠지만 아직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 시기에 조영되기 시작한 회곽묘가 정확히 주자가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조선판 배리에이션variation이었기 때문이다.
주자가례를 면밀히 읽어보면 국조오례의에 기술된 방식과 회곽묘 만드는 방식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제작 방식의 차이점은 16세기 들어 조선사회가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주자가례를 사회 전반에 관철하고자 예학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사대부들에게 뚜렷이 간취되었고 이때부터 심각하게 그 개선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퇴계 이황만 해도 그의 글 중에 조선의 회곽묘 제작 방식이 주자가례에 적어 둔 것과 다르다는 점을 면밀히 고찰한 내용이 있기도 하다.)
조선시대 회곽에 묻힌 부부 두분의 유골. 몇 백년의 조용한 안식을 깨워 송구할 뿐이다.
문헌만 있다면 어떤 고례도 복원 못할 것이 없다고 자신 충만 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아직도 미묘하게 다른 조선의 회곽묘를 명실상부하게 주자가례 내용 그대로 맞추어 가는 또 다른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16세기 이후 회곽묘는 그 이전과 비교하여 구조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는 제작 기법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 조선의 회곽묘는 주자가 채록한 기록의 모습과 명실상부하게 아주 근접한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주자가례가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중국 남방의 수많은 요장묘 중 하나의 축조방식에 불과했던 무덤이 수백년을 지나 고례를 복원하고자 하는 이 땅 유학자들의 맹렬한 탐구 속에 마침내 바다 건너 조선땅 전역에서 수천 수만기의 똑같은 회곽묘 클론들이 만들어 지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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