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주유 중 접한 느닷없는 홍선옥 선생 부고가 어찌하여 남영동 칩거 중이던 집사람 귀에도 들어갔으니, 선생을 집사람도 잘 안다.
여러 번 이런저런 자리에서 대면한 일도 있고, 무엇보다 아들놈을 잘 챙겨주었다는 기억도 또렷했으니, 그 소식에 집사람 또한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집사람이 선생을 추억하며 한 마디 거들기를
"당신 힘들 때 포스코 연구 따는 데도 힘써주셨는데.."
라 했으니 이는 내 해직 이전 일이다.
2015년 연말 나는 다섯 가지 범죄 혐의로 내가 다니던 연합뉴스에서 해직되었거니와
그러고선 2년 가까이 백수생활을 했다.
그 직전 집안에 우환이 있었으니, 저 두 사건 때 내 처지를 알고선 이런저런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이런저런 자리 부러 만들어 불러줬으니, 그런 일들로 용돈은 벌어 썼으니, 그런 분 중에 선생은 언제나 그 첫 머리에 들어간다.
저 포스코 건은 집안 우환 때 이야기라, 그때 목돈이 들어갔다. 뭉칫돈이었다.
그런 사정을 잘 알기에 선생이 병원비 보태 쓰야 한다며 다리를 하나 놓았으니 그것이 바로 포스코 청암재단이었다.
철강왕 박태준 회장이 포스코 회장 재직시절인지, 아니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서인지 당신 호를 따서 청암재단을 설립했으니
마침 선생이 이 청암재단 분들이랑 잘 아는 사이였다.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이 청암재단이 매년 연례 대규모 학술회의를 개최했는데, 꼭 이를 위함은 아니었겠지만 이런저런 데다가 학술연구비도 지원하는 사업도 전개했다.
어느날 저 재단 분들이 당시 북촌 쪽 실크로드박물관으로 온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 나 또한 동석하게 되었는데, 선생이 주최한 조촐한 저녁 자리였다.
그 자리서 선생이 저 재단분들께 즉석에서 말을 꺼내어, 여기 김 기자가 공부도 하고 논문도 쓰는 사람이니, 연구비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 했으니,
그렇게 해서 얼마 뒤 실제 저 재단에서 나한테 연락이 와서 규정을 바꾸어 나를 지원하기로 했으니 연구계획서를 제출해줬으면 한다는 전갈이 왔다.
한데 그 조건이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연구기간 1년, 그 딱 중간에 중간 보고 한 번 하고, 1년 뒤 청암재단이 주최하는 학술대회에서 발표만 하면 되는 그런 조건이었다.
연구비는 물경 천오백만원에 달했다.
고백하자면 이 연구는 기간이 길었고(본래 학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하루살이를 하는 기자한테 1년짜리?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아가 그러면서도 이를 지원한 분들, 특히 재단과 그것을 주선한 선생한테는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는 투철했으니,
결국 좋은 주제, 좋은 성과로 완결해야 하는 일만이 보은하는 길이었다.
1년 뒤, 지금 그 장소를 잃어버렸는데, 강남 봉은사 맞은편 대형 홀이었거니와(첨부사진에 보이네),
이런 식으로 재단이 지원한 연구성과 발표회가 있었으니, 그 자리에는 박태준 회장이 친림해서는 대회 시간 내내 현장을 지켜봤다.
보니 지원한 데가 한둘이 아니라서 섹션을 나누어 룸별로 발표가 있었으니,
토론자를 누굴 섭외하면 좋겠냐 해서 나는 주제로 보아 언뜻 마뜩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다가 독립운동사연구소 김형목 형을 생각하고선 그를 지목했으니 그렇게 해서 발표까지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속한 섹션은 좌장격이 훗날 서울시교육감을 역임하게 되는 서울대 사범대 문용린 교수였거니와,
이 양반을 이런 자리에서 면대할 줄 몰랐지만, 나는 그의 영문법 관련 장기 연재를 숙독한 일이 있거니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면서 이런 일들을 이야기한 기억이 있다.
딴 건 모르겠고, 이날 내 발표에 문 교수가 극찬에 극찬을 했다는 기억만큼은 선명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나는 문 교수가 더욱 고마웠고 무엇보다 이 정도면 밥값은 했겠구나 해서 적이 안심했다.
나로서는 단일 논문 한 편 구상과 자료수집, 그리고 그 완성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투입한 글이 없다.
그 자료수집을 위해 읽은 이른바 원전만 해도 한 트럭이었다.
구한말 이래 식민지시대를 거쳐 초기 현대에 이르는 신문잡지는 깡그리 뒤졌고 단재 전집은 뽀개듯이 읽었으며, 박은식 또한 그리 했고, 양계초는 음빙실전집까지 구해다가 읽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시 번역본이라는 번역본은 다 구해다가 통독했으니,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번역 문제를 봉착하기도 했으니,
살피니 후쿠자와 원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 현대 일본어 역본들을 중역한 것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조금 더 후쿠자와 육성에 가까이 가고자 해서 그 원전들을 파고들기도 했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과 폴란드론인가 하는 논설이 내 논재 전개에서 핵심 중의 핵심이었으니, 불란서 원전과 영어 역본과 한국어 역본을 비교하는 일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특히 후자는 당시까지도 제대로 된 역본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김별아의 문화산책] 공무원 ‘홍 누나’의 조용한 죽음
입력 2025.02.07. 오후 11:54 수정2025.02.08. 오전 12:42 기사원문
향년 66세… 모신 장관만 31명
학벌은 없지만 문화부 꿰뚫으며
빛 안 나는 조력자로 공무원 43년
사소하지만 참으로 흔치 않은 일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886722?sid=103
김별아 선생 이 기고문에 "T가 해직 기자 시절 우환으로 고생할 때 대기업 재단에서 공모하는 논문 프로젝트를 소개해 숨통을 틔워 준 것도 그였다"는 논급이 바로 저 사건이다.
지금 보니 내가 기억착란으로 저 일화를 내가 김별아 작가한테 잘못 증언하는 바람에 저리 처리되고 말았으니 해직시절이 아니라 집안에 우환이 있던 시절이라고 정정해 둔다.
혹 훗날 김 작가가 저런 기고문을 묶어낼 일 있으면 그때 바로잡았으면 한다.
어쩌다 홍 선생을 추억하고자 붓을 든 글이 내 넋두리가 되고 말았다.
상가를 찾지 못한 일이 몹시도 마음 걸려 얼마전 그가 잠든 전등사를 찾았다.
곧 사십구재라 그에도 가기로 했다.
떠난 이는 놓아주어야 한다.
선생을 내가 놓아드리나 저 심연 아래로 침전시켜 내가 힘들면 힘들어서, 즐거우면 즐거워서
불러내 그것을 함께하는 외장하드로 삼고자 한다.
내친 김에 저리 해서 마침내 발표까지 하고 훗날 다른 잡지에 투고한 글이 아래다.
동아시아 근대와 尙武精神의 발견- 韓·中·日, 특히 韓國을 중심으로
The Invention of ‘Militaristic Spirit’ in Modern East Asia
2011, vol., no.9, pp. 273-329 (57 pages), 한국고대사탐구, 한국고대사탐구학회
초록
서구 열강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충격을 받은 동아시아 근대 지식인들은 國亡 혹은 國難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文弱’을 발견했다. 간단히 말해 文에만 치우쳐 武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오늘과 같은 국가적 위기가 초래했다고 진단했던 것이다. 文弱의 발견은 필연적으로 그 극복 방안으로서 尙武정신을 재발견했다.
이는 동아시아 3國에서 공통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서는 이순신과 을지문덕으로 대표되는 救國의 영웅들이 재발견되고, 신라의 ‘화랑정신’이 재발견됐다.
조선에서의 이런 흐름의 직접 단초를 연 이는 중국인 양계초였다. 1898년 戊戌政變 정변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열렬한 언론활동을 통해 ‘국민 만들기’에 주력한다.
그 일환으로 새로운 國民像으로 ‘新民’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갖춰야 할 중요한 도덕윤리 중 하나로 충만한 尙武精神의 무장을 들었다.
양계초는 중국이 累卵의 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文弱의 병폐를 들었다. 사회진화론에 충실한 그는 “중국이 진정으로 문명국가가 되고자 한다면 文弱한 풍조를 청산하고 상무정신을 드높여야 할 것이다”고 강조한다.
그의 이와 같은 진단은 결국 새로운 국가, 새로운 국민, 즉, 新民을 창출하기 위한 예비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文弱을 몰아낸 자리엔 충만한 尙武精神이 차지해야 한다.
이런 尙武精神을 체득한 國民이 주인인 國家는 종래 절대 권력으로 군림한 君主를 대신한다. 王에서 國家로 권력 중심축이 이동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애국심(조국애)이야말로 양계초가 새로운 중국에 대해 제시한 ‘시민종교’였다.
이런 양계초의 생각이 조선에도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양계초의 그것은 일본 망명생활에서 체득한 것이었다.
尙武精神을 강조하는 양계초에게 『中國之武士道』라는 저서가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시사적이다.
1904年 간행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양계초 본인은 서방과 일본 같은 外國人이 중국을 깔보면서 “중국의 역사는 武의 역사가 아니며 중국의 민족은 武의 민족이 아니다”는 말에 격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중국사에서 상무정신의 전형을 보여주는 존재로 무사도라는 존재를 배양하게 한 직접 동인은 日本 武士道였다. 이 일본 무사도는 니토베조에 이르러 비로소 ‘大和魂’으로 재발견됐다.
189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영어판으로 먼저 나온 니토베의 『Bushido』는 그 부제가 ‘the Soul of Japan’이라는 점에서 보듯이 그동안 일본을 열등한 동양의 한 국가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일본 근대국가 이데올로그가 던진 반항이었다.
니토베는 ‘Bushido’를 중세 서양의 ‘기사도’에 비견하며 일본에도 그런 전통이 중세에 있었음을 찬양했지만, 이것이 근대 일본의 創案이자 ‘발견’임은 그와 동시대를 일본에서 보낸 영국인이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즉, B. H. CHAMBERLAIN은 1912년 발표한 ‘the Invention of a New Religion’이라는 글에서 당시 일본사회에 천황숭배(Mikado-worship)와 일본숭배(Japan-worship)가 일본의 새로운 종교(the new Japanese religion)로 대두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Bushido 또한 “10년 혹은 20년 전만 해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Bushido라는 말 자체도 1900년 이전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1900년이란 바로 니토베의 『Bushido』가 간행된 시점을 염두에 둔 표현이며, 이는 『Bushido』가 얼마나 막강한 영향을 끼친 저술이었는지를 확인케 한다.
니토베는 Bushido를 일본의 새로운 “규율의 기관 혹은 규율 코드”(an institution or a code of rules)로 발견하면서 그 도덕윤리로는 義·勇·仁·禮·誠·名譽·忠義를 적출하는 한편, 그 특징으로 割腹과 칼을 제시하면서 마침내 “무사도야말로 야마토 다마시”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요컨대 Bushido는 니토베에게 국민국가 일본이 필요로 하는 국민의 도덕윤리였던 것이다.
Bushido 혹은 武士道는 니토베에게서 비롯되고 梁啓超를 거쳐 마침내 한국에도 상륙해 文弱의 병폐를 쓸어버리고, 尙武精神을 표상할 수 있는 존재로 급속히 재발견되기에 이른다. 조선의 무사도를 표상하는 발견이 바로 ‘花郞’이었다. 근대 국민국가 이데올로그들에게 화랑이야말로 국민국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國民像, 즉, 滅私奉公하고,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殉國武士로 제격이었다.
니토베가 기획한 일본의 무사도, 양계초가 이어받는 중국의 무사도에 대비되어 그 ‘조선적’ 결산을 이루는 성과도 있었으니 1940년 安廓의 저술로 나온 『朝鮮武士英雄傳』이 그것이다.
화랑이 대표하는 무사적 정신이란 文弱과 대비된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없으며 그렇기에 무사정신은 곧 국가가 요구한 바람직한 국민의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尙武精神은 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국민국가를 만들고, 그 주체로서 국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애국심이라는 시민종교의 敎義의 하나로서 발견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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