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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틀림없는 범인도 범인이라 하지 못하는

by 초야잠필 20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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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필자는 조선시대 의문사 사건을 종결하는 데는 

취조 결과 (혹은 증언)
검시 결과,
그리고 무원록에 기록된 관련 사항 

이 셋이 일치해야 비로소 끝난다고 했다. 

대개 두 번을 다른 관리가 검시해서 의견이 동일하면 그대로 사건이 종결되었는데

이때 두 번의 검시가 서로 의견이 같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고, 

검시 때 관련자 증언하고 검시 결과가 안맞거나 무원록에 기록된 관련 사항하고 안 맞으면

상부에서 초검과 재검을 물려 버리고 삼검을 다시 지시했다. 

이때 삼검이 초검과 재검하고 결론이 다르면 

한 번 더 검시를 지시하니 총 네 번의 검시를 서로 다른 관리 (대개 군수) 주재 하에 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최근에 읽은 사건은 아주 재미있는데

어떤 양반이 왠 불한당 둘을 만나 맞아 죽었다는 고발이 들어왔는데 

관리가 가서 보니 몸에 상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취조를 해 보니 맞는 장면을 제대로 본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히 그 둘 때문에 죽은 것은 맞는데 맞은 상처가 안 보이고 내가 패는 걸 봤다는 증언이 안 나오니 

초검관과 재검관은 결국 이를 구타사로 종결하지 못하고 병환으로 종결해야 했다. 

물론 사고가 난지 사흘 만에 죽었으므로 상부에서는 이에 대한 재검을 지시했고 

두 번의 검시가 추가로 더 시행됐는데

이때 추가 검시 때는 검시관이 목표를 딱 정하고 들어온 듯한 심증이 있다. 

첫째는 시신을 샅샅이 뒤져 맞은 상처를 찾았던 듯 하고
둘째는 불한당으로부터 내가 팼다는 자백을 받아 내고자 한 것 같다. 

추가 검시 때 결국, 

시신에서 상처를 찾았고, 

처음 검시 때는 딱 잡아뗀 자들은

돌연 내가 때렸다고 자백을 해버렸다. 

결국 이 사건은 시신에서 상처를 찾고, 그 자리를 내가 때렸다는 자백을 받고 

이것이 무원록의 내용과 상충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

사건은 구타로 인한 살인으로 종결되게 되었다. 

물론 추가 검시에서 돌연 그들이 자백을 순순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백이 나올 때까지 두들겨 팼음이 틀림없다. 

결국 이 사건은 마지막에 좀 어거지로 해결된 감이 없지는 않지만, 

조선시대에 살인죄라고 판결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정황상 살인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판결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살인이라 판결하지 못했고, 

그렇게 되면 바로 상부의 견책과 재조사 명령이 떨어졌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지 더 이야기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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