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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김치 카트 Kimchi Cart로 이사하던 나날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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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내가 태어난 데를 김천이라 하나, 이는 도농통합에 따라 김천을 감싼 금릉군이 김천과 통합되면서 이르는 이름이요,

물론 통합 이전에도 금릉군과 김천시는 구별이 없어 김천이 상대적으로 도시 느낌이 나는 까닭에 금릉 사람들도 외지에 대해서는 다 김천이라 하기는 했지마는 김천과 금릉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금릉을 통합한 김천은 면적이 1,010.05㎢라, 그 크기로 보면 605.2km²인 서울 딱 두 배다.

인구는 13만 5천 명으로 나오는데, 물론 내가 태어나고 자랄 때는 저보다 훨씬 많았으니

무엇보다 그때는 농촌이라 해도 지금과 같은 빈집투성이가 아니요 사람으로 바글바글하던 시절이다. 

그 바글바글한 농촌, 이 시절을 그리워하는 글이 많이 보이는데, 그래 사람으로 넘쳐난 그 시절이 이른바 사람 냄새는 많이 났을지 모르나, 가난으로 찌든 그 시절 많은 식구는 주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내를 중심으로 물경 32킬로미터 이상, 대략 35킬로미터인가를 소백산맥 중턱으로 들어가야 하야 하는 데를 터전으로 삼은 나는 시내에 있는 김천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면서 16살에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자취를 하게 되면서 외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40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않고) 있다.

아마 죽어서나 뼛가루로 다시 돌아가게 될 터인데 혹 모르겠다. 딴 데다 뿌릴지는.

그야 내 선택이 아니지 않는가?

이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스무번 남짓하지 않나 싶은데, 대략 15번 정도까지는 헤아렸으나, 이후에는 별 의미도 없고, 헤아려본들 대수도 아닌 듯해서 그만뒀다. 

고교 재직 3년 동안 세 번인가 네 번인가 자취방을 옮겼다.

입학과 더불어 처음에는 부곡동으로 기억하는데 김천교도소가 시내 복판에 있던 그 시절 그 인근 연탄불 방 계우 몸뚱아리 하나 붙이는 데를 골랐고, 나중에는 학교 기준으로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황금동에서도 했다. 

학교야 날씨 관계없이 자전차로 했다.

그때는 거의 다 연탄으로 난방을 할 때니, 연탄 자취 생활을 한 사람들은 누구나 겪는 일, 곧 그 불 관리가 곤욕이었으니

연탄은 하루에 두 장을 땠거니와, 걸핏하면 불이 꺼지는 바람에 우스갯소리로 연탄비보다 가스탄 비용이 더 들었다. 

또 가끔씩 적당히 연탄가스도 마셔주어 헤롱헤롱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가스중독으로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저 연탄보일러는 또 항시 그 뭐더라? 물관리를 잘해야 했는데, 걸핏하면 다 증발해 버려 곤욕을 치르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연탄 아궁이가 실은 부엌이라, 그 시절 자취방에 무슨 부엌이 따로 있겠는가?

거기다 라면 끓여먹고 다 했다. 그때 전기 밥솥이 있었던가 모르겠는데 없었던 듯하다.

저 연탄불에 밥 하고(그것도 걸핏하면 굶기 요량이었지만) 라면 끓여먹고 다 했다.

한창 먹고 자라야 할 시기에 그랬다. 

이것도 좀 있는 집에서는 형편이 나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자취방을 옮길 때는 리어커를 빌려서 그 리어커로 짐을 싣고 옮겨다녔다.

뭐 가난한 자취 살림이라 해서 거창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 리어커에다가 바리바리 짐 실어 대로를 끌고, 동네 언덕과 골목길을 끌고 다니며 이사했다. 

신학기 개학이라고 아들놈과 조카놈이 어제 상주 자취방으로 짐을 싸서 내려갔다.

이 멍청한 두 놈이 같은 학교를 다니는데, 멀쩡한 기숙사를 어찌어찌하다 놓쳐 버리고선 원룸인지를 얻어 자취 생활을 한다는 말을 나는 어제서야 들었는데,

그 말을 들은 어제 짐을 싣고선 내 차를 몰고서는 지 엄마들이랑 상주로 내려갔다. 

나는 내가 알아서 짐 바리바리 싸들고 김천을 나갔고, 내가 리어커 끌고서 혼자서 이사하고 다 했는데 요새는 아닌 모양이라, 온 식구가 난리를 피워댄다. 

저 리어커를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흔히 김치 카드 Kimchi Cart 라 했다.

내가 카투사 생활을 했으니, 그런 문화에는 조금은 익숙한데, 저놈들은 지들은 없고 한국에만 있는 것들에는 덮어놓고 김치를 갖다 붙였다.

리어커가 없으니 그걸 저리 불렀고 경운기도 김치 뭐라 했으며 

심지어 쪼그려 똥 쌓는 자세도 김치 스쿼드 Kimchi squad라 했다. 

바리바리한 짐을 싣고 떠나는 내 차를 보며 리어커 몰고 이사하던 그 시절이 물끄러미 오버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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