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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그 이웃

[마왕퇴와 그 이웃-53] 호기심과 증오 사이

by 신동훈 識 202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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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가 발견되고 연구가 진행된 71-73년 연간, 

중국대륙의 사람들은 호기심과 증오 사이를 오가며 반응했다. 

인간의 감정이란 별것 아니다. 

호기심은 언제든지 혐오와 증오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미라나 인골 같은 고대에 살던 사람들의 유해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수천년 전 사람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하면

많은 사람이 이에 대해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대하지만 

그 호기심이 언제 증오와 지탄으로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주의해야 한다. 

마왕퇴도 그러했다. 

일전에 마왕퇴에 대한 사인방과 홍위병의 증오에 대해 서술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특기할 만한 것은 마왕퇴 미라가 발견된 후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었다. 

마왕퇴 미라가 발견된 후 무려 이천여년 전의 이 귀부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루머 아닌 루머가 양산되었고 

그 중에는 이 귀부인이 누워있다 벌떡 일어나 이천년 전의 중국어로 주변에 말을 걸었다는 이야기까지 떠도는 판이었다고 한다. 

이 귀부인의 말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때 곽말약 선생이 등장하여 유창한 고대 한어로 귀부인과 소통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 사이의 유언비어는 그 귀부인을 나도 한 번 보자는 욕구로 폭발했다. 

처음에 미라가 발견된 후 북경 도박구의 지시로 귀부인을 보존액에 담궈 처리하고 있었는데 

장사 현지의 공산당 간부와 시민들은 이 미라를 실견해야 겠다는 강한 요구를 해왔다. 

어쩔수 없이 박물관 측은 귀부인을 보존처리 하는 중에 실견하도록 대중 공개를 결정했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당시 미라가 임시로 안치된 열사공원에는 수십 만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사람들이 넘어지고 자빠지고 유리창이 깨져 다칠정도였다고 하니 

이 아수라장을 취재한 신문기자의 보도에 의해 그 난장판은 북경에까지 알려져 

결국 전시회는 강한 질타를 받고 중단되게 되었던 것이다. 

마왕퇴 미라를 실견하자고 요구한 호기심 많은 중국의 인민들과 홍위병은 다른 사람들일까? 

물론 철두철미 계급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사상의 요구에 따라 사고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기심과 증오 사이를 오가며 마왕퇴 미라를 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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