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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그 이웃

[마왕퇴와 그 이웃-56] 일본의 관심

by 신동훈 識 2025.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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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당시 마왕퇴 한묘는 푸바오였다.

 
마왕퇴 한묘가 발견되어 조사되던 무렵은 동서 냉전의 양상이 일대 전환기를 맞던 무렵으로 

소위 말하는 핑퐁외교를 통해 중국과 미국이 냉전을 넘어선 교섭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데탕트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일본으로 

일본 외교가는 미국이 추진하는 외교 기조의 선을 넘지 않으려하되 물밑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중국 외교의 복원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요즘은 중국이 팬더를 단순한 동물원 볼거리를 넘은 세계 외교의 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는데 

그 당시는 마왕퇴 한묘가 탁구와 함께 팬더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중국 지도부는 마침 발견된 마왕퇴 한묘를 대미, 대일 외교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는데,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은 일본쪽의 반응이 미국보다는 훨씬 컸던 모양이다. 

주은래는 냉전 해빙 무드를 타고 중국을 방문한 일본측 인사들에게 마왕퇴 한묘의 발굴 정보를 우선적으로 제공했고 

일본 학계와 출판계는 이 "세기의 발견"에 열광했다. 

다카마쓰 고분. 1972년에 발견되어 일본을 열광시켰다.

일본이 이처럼 열광하게 된 이면에는 마왕퇴 한묘와 거의 동시기에 다카마쓰 고분이 발굴되어 조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카마쓰 고분은 1972년에 발굴되었으니 

무령왕릉 발굴이 1971년 발굴되어, 1971-1973년 연간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국, 일본, 미국에는 "세기의 발견"이 잇따랐던 셈이다. 

우리가 무령왕릉 발굴에 흥분했듯이 당시 일본은 다카마쓰 고분 발굴에 빠져들고 있던 참에 

마왕퇴라는 어마어마한 한묘가 발굴됨에 이르러 

일본은 마치 우에노 공원의 팬더에 몰려들듯이 마왕퇴 발굴에 열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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