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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그 이웃

[마왕퇴와 그 이웃-57] 일본의 세 가지 반응

by 신동훈 識 2025.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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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의 마왕퇴 특보. 아사히 신문은 마왕퇴 속보를 받아 "대후보"라는 이름으로 아예 부정기 호외를 찍었다


당시 일본의 반응을 보면, 지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서, 

학계와 대중 모두 열광적으로 소식을 기다렸다. 

아사히 신문이 이러한 보도의 최전선에 있어 아사히주간에서는 중국에서 흘러나오는 소식과 사진을 받아 계속 속보를 냈고

일본학계도 단순히 소식을 기다리는 수준을 넘어 마왕퇴 한묘의 실체에 대한 논쟁에 적극 뛰어들었다. 

일본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일본이 마왕퇴 조사와 연구에 참여할 수 있을까. 

이 제안은 중국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중국은 시종일관 마왕퇴 한묘를 중국인의 손으로 시작하여 끝내는 것이 국가적 체면과 사회주의 중국의 위신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마왕퇴 한묘를 외교수단으로 이용하는 것과 동시에 이 무덤 조사를 중국인의 손으로 제대로 끝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둘째, 마왕퇴 한묘 1호분에 뭍힌 이는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

일본이 처음 마왕퇴 1호분 발굴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2, 3호분이 발굴되지 않은 상태라 1호분의 피장자가 누구인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1호분 피장자는 2, 3 호분 발굴이 끝났을 때 비로소 확정되었는데,

일본의 동양학자들은 마왕퇴 1호분 피장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의견을 많이 냈다.

일본 쪽에서는 1호분 피장자는 장사왕의 왕비라고 생각했다.

무덤이 너무 커서 서한의 제후 왕이나 가족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째, 어떻게 미라가 보존되었는가에 대한 논쟁

일본은 마왕퇴 미라가 인공적인 방법으로 보존되었다고 생각했다.

발굴 당시 관은 "붉은색 액체"가 남아 있었는데 이를 방부제로 보았다.

일본의 학자들은 이를 아마도 주사 때문에 이렇게 보였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중국 측이 처음 이야기 했던 이 "붉은색 액체"의 발견은 나중에 중국에 의해 재차 부정되었다.

마왕퇴 한묘의 미라가 보존된 원인은 어느 하나로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는 것은 후에 밝혀졌다. 

최근에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만 해도 동양사에 대해서는 일본학계의 의견을 중국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의 마왕퇴 연구는 이렇게 제기되는 일본의 여러 가지 의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측면을 무시 못한다. 

진순신의 중국의 역사. 마왕퇴 발굴이 집필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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