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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김단장께서 올리신 사가교 발굴에 대한 글이나 봉황산 발굴에 대한 글들에서 볼수 있듯이
마왕퇴 이후에도 전국 초묘와 한묘의 발굴은 꽤 있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마왕퇴 정도로 잘 보존된 경우는 거의 없었고,
지금도 마왕퇴는 전국 초묘와 한묘를 대표하는 거대한 발굴 보고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김단장께서 올리신 사진이다.
이 발굴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왕퇴 이후 여러 차례 비슷한 발굴을 거듭하면서
그 조사기법도 점점 정밀해지는 것을 웅변하는 것으로
초기에는 사진에서도 마왕퇴 발굴 때 우왕좌왕하던 모습이 흑백사진으로 찍혀 있는 듯 하지만
지금 이 사진에서는 이미 발굴 당시 고고학자들도 보호복을 착용하고 작업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조선시대 회곽묘 조사 때의 과정을 상기시킨다.
우리 조선시대 회곽묘 및 미라 조사 때도 조사가 거듭됨에 따라 점점 연구 조사가 무난하고 무리 없이 진행되었으며
지금은 발굴 후 연구 조사까지 잘 확립된 기법에 따라 진행되고 있고
그 기법은 필자를 넘어 을지대 오창석 교수와 경희대 홍종하 교수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인류의 발전은 이처럼 경험의 반복에 의해 진보하는 것이다.
처음 시대 때 실패와 미숙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꾸 반복하다 보면 결국 점점 잘 확립된 방법을 찾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사가교 발굴 사진을 보니 필자가 조선시대 미라를 조사하던 시절이 생각나 짧게 글을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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