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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그 이웃101

[강릉미라](1) 만성 위궤양으로 가신 오대부님 호북성 강릉 봉황산 한묘 남자 미라 湖北江陵凤凰山汉墓男尸는 1975년 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성 징저우시荆州市 펑황산 168호 凤凰山168号서한西漢 무덤에서 발굴된 서한 초기 남자 시신으로, 그 이름은 "수遂"이며, 한 문제文帝 13년(기원전 167년)에 매장되었다. 1975년 중국인민해방군 2460부대 7중대는 형주성荆州城 북쪽 기남성纪南城 봉황산에 레이더 기지를 설립할 예정이었다. 이 기지 면적은 5000제곱미터, 그에는 36기 무덤이 있었다.그해 2월 10일, 강릉현 혁명위원회江陵县革命委员会가 상부에 지시를 요청한다.  국가문물사업관리국国家文物事业管理局은 3월 27일 호북성 혁명위원회湖北省革命委员会 승인을 거쳐 레이더 기지를 건설하기 전에 묘지를 발굴할 것을 요구했다.4월 하순, 호북성박물관, 형주박물.. 2025. 3. 2.
[마왕퇴와 그 이웃-21] 팽륭상彭隆祥 (1) 필자가 지금까지 마왕퇴 발굴 과정 중 중국은 문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기 때문에그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이야기들, 주로 난장판에 대해서만 적어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당시 마왕퇴 연구 조사 과정이 엉터리였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이 당시 마왕퇴 연구와 조사 과정에 참여한 고고학자와 의학자들은당시의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지금보아도 대단한 수준의 연구를 남겼다. 고고학 쪽은 스토리가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필자는 여기 자세히 적지 않는다. 아마 필요하다면 김단장께서 다루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여기에 한 인물을 따로 적어두고자 한다. 미라 연구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던 팽륭상彭隆祥이라는 인물이다. 마왕퇴 미라 조사 과정에서 Peng Long-Xiang이라는 인물이 항.. 2025. 3. 2.
[마왕퇴와 그 이웃-20] 방부처리 중인 미라에 몰려든 수십만 군중 마왕퇴 시신은 발견 후 이를 보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었다.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인방 등 당시 문혁을 주도한 이들은 마왕퇴 발굴과 연구 자체에 회의적이라특히 미라 상태로 발견된 시신에 대해서는 아무 가치도 없으니 태워 버리고 끝내라는 주장을 계속했다.하지만, 이런 의견을 누르고 주은래 등은 미라를 보존하고 연구하기로 결정했는데문제는 보존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문제겠다.  결국 방부처리는 해부용 시신이나 좀 얻어볼까 하고 찾은 호남의학원 해부학교수들을 잡아 놓고이들에게 협박 반 사정 반으로 제발 도와달라 해서 이루어졌다. 사실 해부학교수들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의학교육용 시신에 대한 방부처리를 하는 방식대로만 처리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2025. 3. 2.
[마왕퇴와 그 이웃-19] 우리 청동기시대의 비단 옷 마왕퇴 소사단의의 기술사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중국 뿐 아니라 우리와 일본의 비단 옷 역사에 대해서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들 알다시피 중국은 전통시대에 양잠과 비단 옷 짜는 기술을 비밀에 붙였다고 한다. 대륙에 통일왕조가 등장한 이후에는 줄곧 그런 경향이 있었던 모양으로 [대당서역기]에는 그 장면이 이리 적혀있다. "호탄 사람들은 뽕과 누에를 원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호탄왕은 중국에 혼인을 청했고 신부에게 뽕과 누에를 가져와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신부는 남몰래 뽕과 누에 종자를 구하여 자신의 왕관에 숨겨 호탄에 가져왔다."비단이 가지고 있는 고급 직물로서의 선입견, 그리고 중국이 주변에 전파를 원하지 않았다는 위와 같은 기록 덕인지 한반도의 경우 양잠과 비단의 .. 2025. 3. 2.
[마왕퇴와 그 이웃-18] 소사단의素紗襌衣 마왕퇴에서 나온 유물 중에 소사단의라는 것이 있다. 이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한다. 마왕퇴를 다루는데 있어 필자는 의학과 과학 쪽 이야기를 주로 할 것이며 문화적 부분은 김단장께서 풀어갈 것인데, 이 소사단의를 필자가 다루는 이유는 이 옷이 자연과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마왕퇴 미라가 보관된 호남박물원 (전 호남성박물관) 홈페이지를 보면위 그림과 같이 소사단의가 메인 화면에 등극해 있을 정도의 대단한 유물임을 알 수 있다.  이 유물에 대한 설명을 보면, 한 점은 길이가 128센티, 소매 길이가 190센티인데 무게가 겨우 48이고 다른 한점은 49그램이었다. 옷 두 벌의 무게가 합쳐서 100그램이 안되었고 소매와 목둘레 동정을 떼버리면 겨우 25그램이었다. 라고 하여, 전한대에 이미 중.. 2025. 3. 2.
[마왕퇴와 그 이웃-17]: 회곽 구실을 한 백고니, 청고니 조선시대 미라는 다들 알다시피 일부러 만든 인공적 미라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시신이 모두 잘 썩기를 바랬지만, 또 한 가지 벌레와 식물 뿌리, 도굴꾼으로부터 시신이 완전히 썩을 때까지 지켜지기를 원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주자가례의 회곽이다. 이 회곽을 쓴 묘를 회곽묘라 부른다. 주자가례를 보고 만들었으므로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고, 주자가 그 만드는 법을 자세히 이야기했는데, 유심히 주자가례의 주소를 보면 주자 생전에 이미 강남 땅에는 회곽묘가 만들어지고 있던 것을주자가 이 무덤이 사대부들의 무덤으로 쓸 만하다 하여 현창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송대 무덤 중에는 회곽묘가 발견된 바 있어 주자가 이 무덤을 처음 창안한 것은 아니며 강남 지역에 꽤 오래전부터 전해 오던 무덤임.. 2025.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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