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2년 11월 작성된 호남의과대학 혁명위원회 명의의 보고서를 보면 마왕퇴의 조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히고 있다.
당초의 조사에는 의학분야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연구 보고서로 작성하여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부검은 하지 말라는 요구가 있었다.
따라서 내부 조사는 현재 수행하지 못한 상태다.
우리는 시신의 내장 기관에 대해,
두개골을 절개하고 흉복부를 해부해 뇌와 내장기관을 적출한 다음 몸 속에 소독 약품을 채워 넣고 방부처리한 후 다시 봉합해 시신의 외형을 완벽히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처리는 장기적으로 시신의 외향을 보존하는데 더욱 유리하다.
이 보고서는 10월에 이미 올렸지만 아직 허가를 받지 못했다.
시신은 이미 점차 마르고 있다.
이에 대한 의견을 속히 내려주기 바란다.
마왕퇴 미라를 부검할 것인가의 최종 결재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 처럼 주은래가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 당시 이미 방광암이 심각하여 집무를 계속 보기 힘든 상태였다.
특히 방광암이 걸려 투병하는 와중에 사인방은 주은래가 과거에 공산당을 한번 탈당한 증거를 찾았다고 홍위병과 함께 공격했다.
안팎으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정치적, 건강상의 문제가 일단락 된 후 주은래는 최종적으로 1972년 10월
마왕퇴 미라에 대한 부검을 재가했다.
한번 부검이 허가되자 장사에는 문화재 및 언론 관련 인사 40여 명이 집결하였고
이들은 총리의 명에 따라 호남의대 인사들과 함께 미라를 어떻게 부검할 것인가 그 방법론을 논의하였다.
이 당시 토론은 당시의 녹음에 그대로 남아 있어 자초지종을 밝힐 수 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왕퇴 미라를 부검하는데 있어 곽말약이 "일본에서 이 일에 관심이 많다"라고 전언을 전해왔는데
실제 토론에서도 "일본사람들이 관심이 많다" "일본인들이 매우 보고 싶어 한다"라는 이야기가 연구가치가 높다는 이야기와 함께 등장한다는 것이다.
마왕퇴 연구에 있어 당시의 중국학자들에게 일본이란,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지만 학문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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