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융상은 마왕퇴를 조사할 당시 조교수였다.
정확히는 "조교수"에 해당한다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문화혁명 와중에 중국에서는 교수 직급을 몽땅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팽융상은 이 당시 언론에 "조교수"라고 소개되었는데
이는 해외언론에 소개하기 위해 "조교수"라는 직급을 조사 당시 부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류의 직급폐지는 중국이 공산화한 후 대학 말고도 시도된 적이 많다.
예를 들어 인민해방군은 병사들의 평등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계급을 모두 없애고 운영한 적이 있다.
한국 전쟁 당시에도 인민해방군은 "계급장을 떼고" 참전한 것으로 안다.
물론 당시 중국의 참전은 어디까지나 인민해방군의 참전이 아니라 의용군의 참전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계급장을 붙일 필요가 없었던 까닭도 있겠다.
젊은 팽융상은 마왕퇴 부검을 자원한 후 어떻게 이를 조사할 것인지에 대해 제시하였는데
해부학자와 병리학자를 역임하고 있는 당시의 그로서는 타당한 방법을 이야기했다.
간추려 보면 이렇다.
괄호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붙인 설명이다.
먼저 소독을 철저히 한다.
해부시간은 되도록 짧게 한다 (수술시간은 되도록 짧을 수록 좋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가능하다면 되도록 큰 크기로 절단해야 한다.
큰 크기로 절단해도 잘 봉합하면 거의 원상 복구할 수 있다 (부검할 때 지나치게 작게 개방하면 시야가 방해되고 조직 채취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한 기록을 위해 사진과 영화를 충분히 촬영하며 현미경 사진은 반드시 얻는다 (이 기록 덕에 마왕퇴 미라 연구는 매우 충실해졌다.
물자부족과 편법이 난무한 문화혁명 기간에 이는 이례적이었다).
두개골을 개방할 것인지는 많은 숙고가 필요하다.
두개골 개방은 외형 보존에 영향을 많이 미치기 때문이다.
가슴 아래는 반드시 개방해야 한다.
심장과 폐를 적출하려면 이는 어쩔 수 없다.
팽융상의 제안은 병리학자라면 당연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며 지금 보아도 적절하다 할 수 있다.
이날 회의에서 도박구의 왕야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의 설비가 뒤떨어졌다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거 신경쓰지 마라.
주은래 총리도 우리는 개발도상국이라고 말했다.
호남의대에서 문제를 해결해라. 미라를 이리저리 옮기며 조사하지 마라.
다양한 방법을 실시하는 것이 우선으로 앉아서 토론만 하지 마라.
허튼 논의는 국가를 망치고 해부도 망친다. "
그리고 최종 결정된 부검 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합리적이고 온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병리학자인 팽융상으로서는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을 수 있겠다 싶지만
미라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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